03 두려움을 진실하게 전달하라
03 두려움을 진실하게 전달하라
<포춘> 500대 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흥미 있는 결과가 제시되었다. 내로라하는 굴지의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임원회의나 주주총회에서는 세련되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지만 어떤 성과를 축하하는 파티나 사적인 모임에서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많은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무겁고 장중한 대화에는 익숙하지만 가볍고 설레는, 개인적인 친밀함을 드러내야 하는 대화에는 많은 두려움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건 지금부터다. 한 해 수천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리더들이 가볍고 사소한 대화기술을 익히기 위해 비공식적 관계를 컨설팅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를 고용하는 등 아낌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경영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인간미를 갖추기 위해서죠. 인간미가 없는 카리스마는 존경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신뢰' 는 얻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볍고 사소한 대화를 결코 가볍고 사소하게 생각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뛰어난 연설가로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정작 가볍고 친밀한 모임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롯된 두려움 말이다.
세계적인 첼로 연주자인 파블로 카잘스는 대규모 공연에서는 전세계 청중의 격찬을 받았지만, 규모가 작은 무대에서는 극심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다. 팝스타 칼리 사이먼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은 꿈조차 꾸지 못했고, 닐 다이아몬드 또한 공연 때마다 가사가 적힌 텔레프롬프터의 설치를 요구했다. 이처럼 세계적인 아티스트들도 사람들과의 거리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커다란 두려움에 시달렸던 것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가볍고 사소한 대화에 깊은 두려움을 나타내는 사람은 자신의 두뇌에 '노레피네프린’ 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을 지나치게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사람들만 보면 여전히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숨는 아이나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밑으로 숨는 아이와 같은 사람들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또래 남학생이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소녀였다. 그래서 학교 축제에 함께 갈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 그 시절 내게는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축제에 참가하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히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냈다. 내 친오빠의 친구들 가운데 유진이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언젠가 그와 나는 우연히 짝을 이뤄 학교에서 주관한 포크 댄스 교습을 받은 적 있었다. 나는 유진에게 이번 축제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전화를 할 결심이었다.
축제 시작 2주 전, 수화기를 잡은 내 손바닥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결국 전화를 걸지 못했다. 축제 시작 1주 전, 수화기를 귀에 대자 동치는 심장소리가 점점 우레처럼 들려왔다. 역시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마침내 축제 시작 사흘 전, 이렇게 전화를 하지 못하면 결국 축제에서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궁리 끝에 내가 말할 내용을 원고로 미리 작성한 다음, 통화할 때 그걸 그대로 읽어내려 가면 내 뜻을 전달하기가 한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통화가 이뤄졌다.
"안녕, 기억하니? 나는 레일이야. 지난 여름 포크 댄스 시간에 만난적 있지."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가 답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원고를 빠르게 읽어내려 갔다.
“이번 주 토요일에 우리 학교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네가 파트너가 되어주었으면 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내 등허리에 작은 염전이 생긴 것 같았다.
“와, 정말? 영광이구나. 토요일 저녁 7시 30분까지 기숙사로 너를 데리러 갈게. 핑크색 카네이션을 사가면, 네 드레스에 잘 어울릴까? 초대해 줘서 고마워. 아 참, 그리고 내 이름은 스티브야.”
나는 만세라도 부르는 심정으로 “고마워! 기다릴게." 라는 두 마디를 전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스티브? 스티브라니!
어쨌든 스티브는 토요일 지녁 7시 30분에 나를 데리러 왔다.
“사실, 유진은 내 룸메이트야. 네가 내게 전화를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시간을 네가 주지 않았지. 하하. 그런데 한없이 떨리는 네 목소리를 계속 듣는 순간, 네가 정말 사랑스러운 느낌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유진에게 너를 양보하지 않았단다.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스티브는 매력적인 친구였다. 나는 긴장이 풀리면서 한잠을 웃었다. 축제는 아름답고 평화롭고 가슴 설레는 추억들을 내 학창시절에 아로새겨 줬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오빠와 함께 방학을 맞이해 집에 놀러 온 유진을 만났다. 그리고 유진에게 내가 스티브를 만나게 된 얘기를 유쾌하게 털어놓았다. 유진은 놀란 눈을 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나도 그때 너와 축제에 함께 가고 싶었어. 그런데 도무지 전화를 걸 용기를 내지 못했지. 아, 이런… 흑흑……”
나는 그때 한 가지 가볍고 사소한,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며 매우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두려움은 사람이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따라서 두려움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고 강한 척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하는 '용기' 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 용기가 상대에게 뜻밖의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유진은 사람을 얻지 못했지만, 나는 스티브라는 매력적이고 오랫동안 함께 할 좋은 사람을 얻었다. 상대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자는 두려움을 잘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잘 표현해 내는 사람이다.
[출처] 레일 라운즈 지음/임정재 옮김 [사람을 얻는 기술] page 22-29
